<?xml version="1.0" encoding="utf-8" ?>
<?xml-stylesheet href="http://leenyuk.egloos.com/style/style_rss.xsl" type="text/xsl" media="screen"?>
<rss version="2.0" xmlns:dc="http://purl.org/dc/elements/1.1/">
<channel>
	<title>이녁의 모순없는 세계 </title>
	<link>http://leenyuk.egloos.com</link>
	<description>지극히 이녁다운</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Thu, 15 May 2008 02:22:40 GMT</pubDate>
	<generator>Egloos</generator>
	<image>
		<title>이녁의 모순없는 세계 </title>
		<url>http://pds8.egloos.com/logo/200805/12/23/e0030223.jpg</url>
		<link>http://leenyuk.egloos.com</link>
		<width>80</width>
		<height>102</height>
		<description>지극히 이녁다운</description>
	</image>
  	<item>
		<title><![CDATA[ 물타기 ]]> </title>
		<link>http://leenyuk.egloos.com/1702560</link>
		<guid>http://leenyuk.egloos.com/1702560</guid>
		<description>
			<![CDATA[ 
  &nbsp;얼마전 방영된 모 TV프로그램 이후 한우의 안전성 문제가 광우병 논란의 새로운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걸 보고 어떤 사람들은 '이제와서 한우 쇠고기 이야기를 꺼내는 건 물타기' 라고 주장하는데 과연 물타기를 먼저 시작한 게 누구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br>&nbsp;<br>&nbsp;광우병의 위험성 문제(이걸 문제ⓐ라 하자),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 문제. 물론 중요하다. 그것도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위험성 문제는 어느정도 과학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문제고, 당연히 전문가들에게 판단을 맡겨야 한다.&nbsp;정보가 부족하고 전문가들도 의견이 엇갈리기는 하지만 최소한 일반 시민보다는 사실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br><br>&nbsp;진짜 시민들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할 부분은 정부의 협상 자세(이건 문제ⓑ)다. 설사 미국산 소고기가 100%안전한 것으로 판명된다 하더라도 시민들이 그것을 반대한다면 민주국가의 정부는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 정부의 외교 정책, 경제 정책, 협상 정책은 정치적 문제인 만큼 시민들의 의사를 충실히 반영하고 따라야 한다.<br><br>&nbsp;결국 진짜 촛불을 든 시민들이 문제삼아야 할 부분은 ⓐ가 아니라 ⓑ이다. 일단 문제의 초점이 ⓐ로 가는 순간 불분명한 정보와 부족한 전문성, 각종 과장이나 선동 따위로 인해 끝없는 소모적 논쟁만 벌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한우가 위험하니 미국소가 위험하니, 프리온이 600도에 죽니 안죽니 하는 논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br><br>&nbsp;게다가 ⓐ를 잡고 미국소의 위험성, 광우병의 위험성 문제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한우의 위험성이라는 반론에 취약해진다. 정말 미국소가 광우병 때문에 위험하고, 그 광우병이 몇십년 후에는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공포의 대상이라면, 한우 역시 폐사시키거나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하기 때문이다. <br><br>&nbsp;그런 의미에서 진정한&nbsp;물타기는 한우의 위험성 문제가 나오는 순간이 아니라&nbsp;시민들의 눈이 '정부' 대신 '광우병' 으로 옮겨갔을 때에 시작된다.&nbsp;그리고 슬프게도 그 물타기를 시작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도 조중동도 아닌 광우병의 공포를 퍼트리며 촛불 들기를 설득한 사람들이다. <br><br>&nbsp;굳이 광우병의 위험성을 뻥튀기하지 않더라도 미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한심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서&nbsp;미국산 쇠고기 개방을 반대하고, 이명박 정부를 비판할 충분한 명분과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참고로 엉뚱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미리 말하자면 나 이녁은 촛불시위가 처음 발생했을 때부터 이런 입장이었다. 한마디로 "미국산 쇠고기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정부의 무능력함은 규탄한다. 그리고 정부는 시민들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 이게 내 입장이다.<br>			 ]]> 
		</description>
		<category>소품집</category>
		<pubDate>Thu, 15 May 2008 02:20:39 GMT</pubDate>
		<dc:creator>이녁</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광우병과 영상매체 ]]> </title>
		<link>http://leenyuk.egloos.com/1701167</link>
		<guid>http://leenyuk.egloos.com/1701167</guid>
		<description>
			<![CDATA[ 
  <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VweGUU3R5eg$" width="502"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 bgcolor="#000000"><br><br>&nbsp;평소 EBS 지식채녈 e는 뉴스, 개콘과 더불어 내가 즐겨보는 몇 안되는 프로그램 중 하나다. 매번 의미있는 주제와 뛰어난 편집으로 무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식채널e는 영상매체의 가능성을 훌륭하게&nbsp;보여주고 있는 프로그램이다.<br><br>&nbsp;얼마 전EBS지식채널에서 [17년 후]라는 제목으로 인간 광우병을 다룬 내용을 방송했다. 인간 광우병으로 인한 논란이 많은데다 인간 광우병의 위험성과 거기에 대처한 영국 당국의 미숙한 태도를 적절한 편집으로 간결하면서도 충격적으로 보여준 탓에 놀라울 정도의 인기를 얻으며 인터넷 여기저기에 퍼지고 있다.<br><br>&nbsp;이 동영상은 내용을 떠나 한번쯤 봐 둘 가치가 있다.&nbsp;영상매체가 가지는 장점과 그것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영상매체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nbsp;<br><br>&nbsp;이&nbsp;동영상은&nbsp;고양이 한마리에서부터 인간 광우병으로 200명에 가까운 사람 - 그리고 그 중 농림부 장관 딸의 친구도 있다 - 이 죽을 때까지 20여년이라는 시간동안 일어난 주요 사건을을 음울한 음악과 함께 배치하여 예측할 수 없는 광우병에 대한 공포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nbsp;<br><br>&nbsp;그 결과 광우병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도 이 영상을 보면 광우병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기 쉽다.&nbsp;다양한 감각과 편집을 통한 내용의 효율적이고 확실한 전달.&nbsp;이것은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고, 편집을 통해 시간과 사건을 효과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영상매체만이 가지는 힘이자 장점이다.<br><br>&nbsp;반면 이 동영상은 영상매체가 가지는 단점과 위험성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동영상의 클라이막스이자 가장 충격적인 반전(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기는 하지만)은 첫 장면에서 딸과 함께 쇠고기의 안전성을 홍보하던 농림부 장관의 딸 친구가 광우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 대목에서 예측할 수 없는 공포에 대한 두려움과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감은 극에 달한다. <br><br>&nbsp;그러나 따지고 보면 농림부 장관 딸의 친구가 죽은 것과 광우병의 위험성/정부의 정책 사이에는 별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엘리자베스 스미스가 농림부 장관 딸 친구든 농림부 장관 사돈의 팔촌 친구든 그녀는 2000만명중 발생한 200여명의 환자 중 한명일 뿐이다. 그녀가 농림부 장관 딸의 친구라는 사실이 상징적인 의미는 가질 수 있을지언정 그녀의 존재로 인해 광우병의 위험성이 갑자기 높아지는 일은 없다.<br><br>&nbsp;또한 (인간)광우병의 존재가 처음 영국에 나타났을 때, 그 병의 실체에 대해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영국 정부로서도 뚜렷한 대응을 하기 힘들었던 게 당연함에도 이 동영상은 그 사실을 은폐시키고 있다. 즉 마치 영국 정부가 오늘날과 같이 상당수의 정보를 가지고 있음에도 '고의로' 광우병의 위험을 키운 것처럼 내용을 편집하고 있는 것이다.&nbsp;<br><br>&nbsp;오늘날 돌이켜보면 고양이 한 마리가 죽었을 때 확실한 예방정책을 펼치지 않은 영국 정부가 어리석어 보인다.&nbsp;그러나 2008년 한국에서 어느날 고양이 한 마리가 의문의 병으로 죽었다면 그걸 가지고 정부가 '확실한' 대응을 할 수 있을까? 만약 그걸 가지고 정부가 '미친 돼지병' 따위가 의심된다며 몇개월 이상의 돼지를 모두 폐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과연 그 정책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nbsp;될지 의문이다.<br><br>&nbsp;결국 이 영상은 음울한 분위기의 음악과 각종 시각적 자료들 -농림부 장관과 그의 딸 친구로 상징되는 처음과 끝의 분명한&nbsp;대비, 쓰러지는 소의 모습, 페사된 소의 역겨운 시체, 실험실의 위험물질 샘플, 신문기사, 영국 국회의사당 - 을&nbsp;적절히 편집함으로서 광우병에 대한 공포를 실제보다 과장하여 극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br><br>&nbsp;그러므로 이 영상은 광우병에 대한 무관심에 경종을 울리고, 예측하기 힘든 위협에 대해 다시한번 주의를 표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만약 편집을 거친 영상매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짧고도 간결하게 광우병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20년이 넘는 시간을 6분이라는 짧은 시간으로 축소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편집은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된 공포를 퍼트리는 일종의 선동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br><br>&nbsp;이 영상을 광우병의 충격적인 진실을 알여주는 명작 단편 다큐멘터리로 받아드리든, 편집의 힘을 악용한 선동 영상으로 받아드리든 그것은 수용자 마음이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보이는 영상이 전부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너무나 상식적인 사실이지만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들은 종종 영상매체가 가져다 주는 생생함에 압도된 나머지 그 기본적인&nbsp;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br><br>&nbsp;따라서 이 짤막한 영상은 표면적으로는 광우병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지만, 동시에 영상매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던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br><br><br>P.S. 참고로 내가 이 영상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잘 모른다면 일단 전문가들을 믿자' 이거다.			 ]]> 
		</description>
		<category>글</category>
		<pubDate>Wed, 14 May 2008 13:17:46 GMT</pubDate>
		<dc:creator>이녁</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20대에 대한 단상 ]]> </title>
		<link>http://leenyuk.egloos.com/1698735</link>
		<guid>http://leenyuk.egloos.com/1698735</guid>
		<description>
			<![CDATA[ 
  <strong>서론 : 20대에 대한 비판<br></strong><br>&nbsp;20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20대가&nbsp;무기력하다거나 20대는 연대를 모른다는&nbsp;비판은 애교 수준이다. 20대의 정치 지향은 50대와 같다는 말부터,&nbsp;20대는 10대보다도 정치의식이 없다는 말,&nbsp;심지어 20대 개세끼론까지 등장했다. 지난&nbsp;대선과 총선때에는 20대의&nbsp;저조한 투표 참여와 투표 경향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최근에는 10대도 나가는 촛불집회에 안나가는 20대가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다.&nbsp;어느새인가 '무기력하며 정치의식이 없고 이기적인 20대' 라는 이미지가&nbsp;만들어진 것이다.<br><br>&nbsp;그러나 과연 그럴까? 정말 20대는 무기력하며 정치의식도 없고 이기적이기까지 한 한심한 세대들인가? 그리고&nbsp;그들을 비판, 혹은 비난하는 일은 20대를&nbsp;계몽시키는 데 도움이 될까? 한 세대를 어떻다고 정의내리는 건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지고&nbsp;있는 20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얼마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 정도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으리라 본다.<br><br><strong>20대와 대학생<br></strong><br>&nbsp;20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한 부류는 학생이고 다른 한 부류는 사회인이다. 학생의 범주에는 대학생, 대학원생, 대입 준비생, 취업 준비생, 고시생이 들어갈 수 있겠고 사회인은 말 그대로 직업생활을 하는 20대이다. 물론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니트족과 같은 사람들이 있지만 크게 봐서 20대는 학생과 사회인으로 나눌 수 있다.<br><br>&nbsp;그러나 20대에 대한 담론의 상당수가 20대와 대학생을 동일시한다. 그리고 70년대, 80년대의 '의식있는' 대학생과 현재의 '의식없는' 20대를 획일적으로 비교한다. 이런식의 비교는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첫째는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시절에도 학생이 아닌 사회인 20대는 그다지 활발하게 투쟁과 연대에 나서지 않았다는 점. 둘째는 대학생이라는 신분의 의미 자체가 달라졌다는 점이다.<br><br>&nbsp;오늘날 386세대라 불리는 이들이 민주화 운동과 투쟁에 앞장섰을 때에도 공장과 회사에서 일하던 평범한 사회인 20대들은 보수까지는 아닐지언적 386 대학생들만큼 정치의식이 있지도, 참여의지가 있지도 않았다. 당시 고시준비나 취업준비를 하던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캠퍼스 내에도 투쟁에 대해 방관적이거나 비판적이었던 이들이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식있는 과거의 대학생이라는 이미지는 이러한 침묵한 이들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린다.<br><br>&nbsp;대학생의 사회적 신분이 달라진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이전에 <a href="http://www.skepticalleft.com/bbs/board.php?bo_table=01_main_square&amp;wr_id=14288&amp;sca=&amp;sfl=mb_id%2C1&amp;stx=lee_nyuk">제법 긴 글</a>을 쓴 적이 있으니 여기서는 간단히 이야기하겠다. 일단 대학생 수가 엄청나게 늘었다. 1990년까지만 해도 30%에 달하던 대학 진학율이 현재는 90%에 이른다. 상위 30%만 대학에 갔던 시절과 하위 10%를 제외한 모두가 대학에 가는 현재(일단 성적순을 기준으로 삼자) 후자의 평균 수준이 떨어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또한 대학생이 (예비)지식인이었던 과거와 달리 현재의 대학생은 취업 준비생, 지식 습득자에 가깝다. 한마디로&nbsp;대학생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대학생이라는 직업의 지위가 달라졌다.<br><br>&nbsp;결국 현재의 20대 전반을 과거의 의식있던 소수의 대학생과 일괄 비교하고, 전자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할 뿐 아니라 과거를 왜곡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20대 담론의 상당수가 이러한 왜곡된 기반 위해서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다.<br><br><strong>20대는 어디에 서있는가?</strong><br><br>&nbsp;사회 현실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 받지 않는 세대는 없다. 그것은 어느 세대든 마찬가지다. 80년대의 대학생들이 투쟁에 앞장선 것도 독재 정권의 억압이라는 사회 현실에 대한 대응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던가. 따라서 현재의 20대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20대가 서있는 현실, 20대를 둘러싸고 있는 한국사회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br><br>&nbsp;현재의 20대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한마디로 IMF 와 함께 자란 세대라 할 수 있다. 내가 21살로 88년생인데 내가 초등학교 3학년때 IMF 위기가 닥쳤다. 현재 29살인 경우 18세, 즉 고등학교 2학년 때 IMF위기가 닥쳐왔다. 현재의 20대는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IMF 속에서 보내며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공포와 돈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배운 세대다. 그렇다고 어린시절부터 '경제교육' 을 받은 10대들과도 다르다. 10대들의 경우 아주 어린 시절부터 IMF와 함께 자란만큼 IMF시대에 적응하는 법을 어릴적부터 배운 반면 20대는 막 철이 들었을 때 '갑자기' 험난한 세상에 던져진 세대다.<br><br>&nbsp;그렇다고 20대들에게 선택의 기회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IMF가 왔고 - 개인적 체험일지는 몰라도 나는 아직도 갑자기 나라가 망했고 제2의 국치일이 찾아왔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 그 당시 10대였던 현재의 20대들은 변한 현실에 적응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반 친구가 집안이 망해서 점심을 굶는 모습을 보며 자란 20대들이 경제문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nbsp;<br><br>&nbsp;80년대 대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 자유였다. 당시는 최소한 취업 걱정, 먹고살 걱정은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유와 민주주의가 없었고, 대학생들은 그것을 찾기 위해 싸웠다. 반면 현재의 20대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적 자유다. 요즘은 자유의 부족, 민주주의의 결핍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대신 경제적 여유가 없고 대학생들은 그것을 갖기 위해 싸우고 있다. <br><br>&nbsp;이것이 나쁜 것인가? 취업을 위해 도서관에서 밤을 세우는 오늘날의 '의식없는' 20대들도, 투쟁을 위해 싸운 과거의 '의식있는' 대학생들도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의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과거 대학생들의 용기와 실천에는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하겠지만,&nbsp;과거의 영광이&nbsp;취업이라는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20대를 비난할 합리적인 근거는 되지 못할 것이다.<br><br><strong>연대의 환상 혹은 폭력</strong><br><br>&nbsp;현재의 20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적잖은 이들이 연대의식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20대를 질타하는 이들이 주로 지적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연대의식의 부족. 연대의식의 부족은 20대의 한심함을 나타내는 증거이며, 20대가 현실의 억압과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20대간 연대, 세대간 연대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상당히 많은 지지자를 얻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허망한 환상에 불과하거나 심지어 폭력에 가깝지 결코 희망이 아니다.<br><br>&nbsp;일단 연대의 실체가 불분명하다. 도대체 연대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연대를 외치고 연대의식을 외치는 이들은 많지만 정작 그렇게 강조하는 연대의 정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연대는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nbsp;연대하지 않으면 최소한의 생존조차 보장받기 힘들 때나 연대가 자신의 이익에 부합할 때가 아니라면 자발적인 연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당연한 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며 타인과 위험을 공유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br><br>&nbsp;연대가 환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연대를 위해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 이익 대신(그것이 일시적인 것일지라도) 공동의 이익을 생각하고, 동시에 자신이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위험마저 기꺼이 감수할 정도로 이타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순간의 이익을 포기하고 먼~ 장래 모두가 누리게 될 이익을 추구할 정도로 참을성있고 지혜롭던지. 불행히도 대다수 사람은 그렇게 이타적이지도 참을성이 있지도, 지혜롭지도 않다. 애당초 그렇게 이타적인 사람들의 세계라면 연대를 통해 해결해야 할 정도의 사회 모순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br><br>&nbsp;환상까지는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연대에 대한 강조, 연대에 대한 강요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이다. 현재의 20대는 50대 이상의 노년과 함께 세대 중 가장 약자에 속한다. 차라리 10대는 부모의 보호라도 있고 30대는 IMF이전의 막차를 잡거나 불안하나마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다. 20대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20대에게 연대를 강요하고 있다. 그것도 세대간 연대를 말이다. 좋다. 약자끼리 연대해야 하는 만큼 세대간 연대는 필요하다. 하지만 약자와 강자가 연대를 한다면 강자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고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게 도리다. 강자가 자신의 기득권은 포기하지 않으면서 약자에게 연대를 하라고 외친다면 그건 기만일 뿐이다.<br><br>&nbsp;또 연대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20대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현실을 은폐한다. 비록 그것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대신 연대라는 환상에 안주함으로서 궁극적으로는 20대를 환상에 빠진 바보로 만드는 꼴이다. 그런 점에서 연대 만능주의자들은 신 자유주의 만능주의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후자는 '니' 힘으로 알아서 극복하라는 것을 주문하고, 후자는 '니들' 힘으로 알아서 극복하라는 것을 주문한다는 정도다.<br><br><strong>짱돌이냐 토플책이냐</strong><br><br>&nbsp;토플책을 놓고 짱돌을 들어라! 작년 큰 화제가 되었던 책 [88만원 세대]의 저자들이 꽤나 진지하게 주장한 구호다. 간단한데다 토플책과 짱돌이라는 그럴듯한 비유를 잘 사용하고 있어서 책의 인기만큼이나 많은 호응을 얻은 구호였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간결하고도 멋진 구호는 말 그대로 구호일 뿐이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구호도 아니며,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의미있는 구호는 더더욱 아니다.<br><br>&nbsp;짱돌과 토플책은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며, 일시적으로 대립할 수도 있다. 이녁이 토플공부에 매달린다면 당장 현장에서 짱돌을 던질 투사가 한명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의 투쟁, 한차례의 집회가 아니라 시야를 넓게 가져보자. 과연 짱돌과 토플책은 대립하는 관계일까? 아니다. 오히려 서로 보완해주는 관계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토플책 없이는 짱돌이 의미없는 사회가 찾아온 것이다.<br><br>&nbsp;현대사회는 과거 어느 사회보다 복잡하고 복잡한 만큼 세분화, 전문화되어있다. 이건 초등학생들도 아는 상식이다. 그 사회에서 담론을 주도하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전문지식이다. 실천과 행동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탄탄한 전문지식의 뒷받침 없는 실천은 일시적인 흐름은 만들지언정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지는 못한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리고 어디에 문제가 있으며,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모른다면 아무리 투쟁의 결과로 힘을 얻는다 해도 무용지물이다. <br><br>&nbsp;제대로 된 정보, 신속한 최신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외국어, 특히 영어가 필수적이고, 사회의 각종 현안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공부가 필수적이다. 한 분야에서 여론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전문지식이 필요하다. 그런 시대다. 짱돌을 들고 싶어도 토플책으로 머리를 채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꾸기 힘든 세상이다.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온다고 했다지만 현대 사회의 권력(그리고 부)은 지식과 정보에서 온다. 짱돌과 토플책을 대립시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제는 토플책에서 변화의 힘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개혁의 주체는 열정에 불타는 투사가 아니라 냉철한 이성과 지식을 갖춘 전문가들이다.<br><br><strong>결론 : 유령과 유령의 싸움</strong><br><br>&nbsp;이상의 논의들을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무기력하며 정치의식이 없고, 이기적인 20대' 는 만들어진 이미지, 그것도 현실을 왜곡하는 그릇된 이미지일 뿐이다. 한국의 20대는 무기력한 존재도, 계몽되어야 할 어리석은 존재도 아니다. 그들은 주어진 현실 속에서 주어진 바를 묵묵히 해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투쟁의 기억을 가진 이들에게는 불만스러워 보일수도 있고, 정의감에 불타는 20대들에게는 한심에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이고 20세기식 투쟁이 가능한 시대도, 바람직한 시대도 아니다. 대학생이 엘리트가 아닌 시대고 토플책이 짱돌과 함께가는 시대다. 이런 시대 맥락을 무시하고, 20대가 처해있는 현실을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가지고 20대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a href="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662">참고</a>)<br><br>&nbsp;최근에는 청계천 촛불집회에 교복을 입고 나온 10대 청소년들을 예찬하며 20대보다 10대가 낫다는 식으로 비겁한 20대와 용기있는 10대를 대비시키는 사람들마저 있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은 결코 현실에 대한 체계적인 관찰과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이&nbsp;비난하는 비겁한 20대는 실체가 없고 그들이 예찬하는 용감한 10대는 아직 실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유령을 세워놓고 새로운 유령을 불러 싸우게 시키는 셈이다.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오늘날 20대에 대한 비판적인 담론을 전파하는 이들은 과연 그런가? 만약 정확한 현실 인식보다 이념에 현실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시도가 앞선다면 그것은 종교 행위는 될 수 있을지라도 진지한 여론 형성은 되기 힘들 것이다.<br>			 ]]> 
		</description>
		<category>글</category>
		<pubDate>Tue, 13 May 2008 14:34:52 GMT</pubDate>
		<dc:creator>이녁</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오늘은 학교 축제로군요 ]]> </title>
		<link>http://leenyuk.egloos.com/1697056</link>
		<guid>http://leenyuk.egloos.com/1697056</guid>
		<description>
			<![CDATA[ 
  그리고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br><br><strike>개인적으로는 매우 기쁜 일입니다.</strike>			 ]]> 
		</description>
		<category>삶</category>
		<pubDate>Tue, 13 May 2008 02:55:51 GMT</pubDate>
		<dc:creator>이녁</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진중권씨의 딜레마 ]]> </title>
		<link>http://leenyuk.egloos.com/1695544</link>
		<guid>http://leenyuk.egloos.com/1695544</guid>
		<description>
			<![CDATA[ 
  <strong>그날 그는 말이 없었다</strong><br><br>&nbsp;많은 이들이 기대했다. 한방 크게 터트릴 것이라고.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기다렸다. 이전에도 그랬다 조용히 있다가도 한번 입을 열면 특유의 달변과 독설이라고 불릴 정도의 날카로운 풍자로 상대방을 일격에 날려버리곤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방송이 끝날 때까지 그는 사람들이 기대하던 한방을 보여주지 못했다.&nbsp;<br><br>&nbsp;다 알겠지만 지난주 MBC 100분 토론에 출현한 진중권씨 이야기다. 내내 MP만 채우다 게임 끝나버렸다는 누군가의 비아냥 섞인 평가처럼 그는 '진중권답지 않게' 조용했다. 어째서 그는 그날&nbsp;말이 없었을까? <br><br><strong>진중권의 위치</strong><br><br>&nbsp;진중권씨는 현재 한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논객이다. 그는 진보신당의 든든한 기둥이기도 하며, 동시에 이명박 정부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이기도 하다. 그를 대안 없이 상대를 비꼬는 데만 능숙한 독설가로 폄하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가 당파를 떠나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수준높은 논객임은 부정할 수 없다.<br><br>&nbsp;진중권씨는 전문가형 지식인이 아니다.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거나 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이론가도 아니다. 그가 전공한 미학 분야에 있어서 진중권씨를 전문가라 부를 수는 있겠지만 정치와 사회를 논하는 논객 진중권을 전문가라고 칭하기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br><br>&nbsp;그러나 그럼에도 진중권씨는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무기인 날카로운 독설과 신랄한 풍자를 빼놓을 수 없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서있는 '위치'에서 찾을 수 있다.<br><br>&nbsp;그는 기본적으로 진보 지식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보 지식인들이 빠지기 쉬운 민중주의, 대중 만능주의의 덫을 끊임없이 경계한다. 최근 그에게 가장 큰 명성을 안겨준 황우석 사태와 D-WAR논란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황우석을 지지하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을 과감하게 비판했으며, D-WAR라는 영화와 그 영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소위 '디빠' 들과 치열하게 싸웠다. <br><br>&nbsp;그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그 참여의 힘을 긍정하지만 동시에 이성을 잃은 참여가 가진 위험성을 잘 알고 그것을 경고하는 인물이다. 그러기에 그는 종종 엘리트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지만 대중의 폭풍같은 감정이 지나간 이후 그는 승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대중의 광기에 맞서는 이성주의의 투사라는 자리! 이것이 그를 개념인으로 만든 진중권의 위치이다.<br><br><strong>이명박 시대의 진중권<br></strong><br>&nbsp;그러나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된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더이상 진중권씨가 기존에 있었던 '대중의 광기에 맞서는 이성주의의 투사' 자리에 안주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물론 그가 논객의 지위를 벗어나 학자로 돌아간다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이명박 정부를 반대하는 논객이자, 진보신당 당원(준 정치인) 진중권으로서는 자신을 개념인으로 만들어준 그 위치를 벗어날 수 밖에 없는 때가 온 것이다.<br><br>&nbsp;이명박 시대가 시작된 이후, 진중권씨는 열광하는 대중과 함께하고 있다. 인수위 시절부터 현재까지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그의 글 하나하나는 각종 블로그와 사이트로 복사되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그리고 그 환호의 와중에서 진중권씨는 대중에게서 한발자국 떨어진 외롭고 냉정한 관찰자라는 입장에서 대중의 분노를 대변하는 대변자로 입장을 바꾸게 되었다. 진중권씨의 본래 의도가 어떻든간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와중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위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br><br><strong>진중권씨의 딜레마<br></strong><br>&nbsp;여기서 진중권씨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그는 이슈를 만들어내고 대안을 제시하는 성격의 논객이 아니다. 기존 이슈에 뛰어들어 사실과 선동을 구분하고 상식의 입장에서 이슈를 정리하는 성격의 논객이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입장에 선 이상 '광우병 반대' 와 '이명박 탄핵' 을 외치는 대중, 감정적인 대중과 함께 설 수 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며 그의 몸값은 과거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진중권으로서의 정체성과 위치를 위협받고 있다.<br><br>&nbsp;이건 내 머리속에서 나온 추측이 아니다. 진중권씨는 MBC100분 토론이 끝난 후 진보신당 게시판에 후기를 적으며 "우리 쪽 패널들이 말린 게 사실"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내면서도 "하지만 이 사안에 관한 한, 제가 말한 것 이상은 주장하기 곤란하다" 거나 "독설을 펼 수도 있었겠지만, 광우병에 대한 과장된 담론이 떠도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이상, 지금 중요한 것은 대중에게 논리적으로 안전하게 주장할 수 있는 선을 제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는 이야기를 했다.(<a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0509143618">5/9 프레시안</a>)<br><br>&nbsp;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중권씨는 광우병에 대한 담론이 과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대중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과장된 공포와 근거없는 선동이&nbsp;위험할 수 있다는&nbsp;사실도 잘 알고있다. 그가 촛불집회에 나가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은 이명박 타도가 아닌 냉정이었다. 황우석 사태때, D-WAR사태때 감정에 휩쓸린 사람들을 비판한 것처럼 그는 이번에도 감정에 휩쓸려 촛불을 든 이들을 비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br><br>&nbsp;그렇지만 그는 촛불을 든 이들을 비판할 수 없다. 비록 그들이 감정에 휩쓸린 면이 있을지라도 그들은 이명박 정부의 폭주를 막는 가장 적극적인 세력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사람들이 모두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면 현재와 같이 촛불집회가 커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진보논객 진중권은 대중의 감정에 편승하고 있지만, 이성주의의 외로운 투사 진중권은 대중의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 <br><br>&nbsp;이것이 진중권씨가 가진 딜레마이다. 그리고 진중권씨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향후 그가 진정한 1류 논객으로 자리를 잡을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런 정치 평론가에 그칠 것인지가 판가름날 것이다. 진중권씨는 지금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셈이다.<br>			 ]]> 
		</description>
		<category>글</category>
		<pubDate>Mon, 12 May 2008 13:13:31 GMT</pubDate>
		<dc:creator>이녁</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망콘콘 이데올로기 ]]> </title>
		<link>http://leenyuk.egloos.com/1693998</link>
		<guid>http://leenyuk.egloos.com/1693998</guid>
		<description>
			<![CDATA[ 
  <br><strong>서론을 대신해서<br><br></strong>&nbsp;이데올로기. 이런 거창한 말은 망콘콘에게 안어울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터넷이라는 넓은 공간속을 떠다니는 다양한 사람들의 유사한 태도와 행동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좋은 말을 찾기 힘들어서 그냥 그대로 쓴다. 뭐 이건 아직도 내가 역겨운 철부지의 지적 허영을 못 벗어났다는 증거라면 증거다.<br><br><strong>까고 까고 또깐다<br></strong><br>&nbsp;망콘콘 블로그, 이른바 망콘갤이라고 불리는 그 공간의 특징은 무엇일까? 특징이야 여러가지다. 엄청난 수의 리플, 망콘콘과 친구들(?)의 덧글놀이, 적절한 떡밥, 죽여도 죽여도 부활하는 놀라운 근성...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망콘갤의 성격은 바로 '까기' 다. 망콘콘은 달빠를 깐다. 노빠도 까고 명빠도 까고 문빠도 깐다. 때로는 이명박을 까는가 싶더니 때로는 노무현을 깐다. 국개론을 소개하지만 동시에 국개론 신봉자들을 깐다. 찌질이들을 까고 덕후들을 까고 동인녀들을 깐다. <br><br>&nbsp;가끔은 자기 자신을 까고 망콘갤러들을 깐다. 과연 와타라세 빼고 망콘콘이 안 깐 상대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까고 또 깐다. 망콘의 진정한 정치 성향이나 진짜 취향(?)은 아무도 잘 모른다.(<strike>답이 없는 게이 희망자라는 걸 제외하면</strike>) 그래도 상관없다. 이놈도 까고 저놈도 깐다. 디씨의 막장성을 까고 타입문넷의 찌질함을 까고 이글루스의 가식을 깐다. 결국 망콘갤은 까고 까고 또까는 공간이다. <br><br><strong>정당한 까기</strong><br><br>&nbsp;망콘콘의 까기는 적잖은 이들의 공감을 얻는다. 때로는 개념글 소리를 들으며 이오공감에 올라가기도 한다. 왜 그럴까? 망콘갤러들이 막장이라서 그런걸까? 아니면&nbsp;이글루스가 DC화 되어서 그런걸까? 아마 가장 정확한 답은 까는데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이것이리라 본다. 대책없이 이놈저놈 다 까지만 까이는 대상이 까일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까는것을 '정의' 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으니까 사람들이 망콘콘의 까기를 단순히 '개찌질이의 지랄' 로 취급하지 못하는 것이다.<br><br>&nbsp;시사IN에도 올라간 망콘콘의 싫어하는 놈 인기투표는 이러한 '정당한 까기' 가 작동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아마 많은 이들이 망콘콘의 터무니 없는 짓거리에 놀라움을 표하고 너무 심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싫은놈' 순위에 오른 블로거들을 보며 어느정도는 왜 그들이 까였는지를 이해했을 것이다. 적어도 "망콘콘이 처음에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싫은놈으로 뽑힌 블로거들도 문제가 있다." 는 의견이 존재했고, 적잖은 지지를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br><br>&nbsp;이처럼 망콘콘의 까기는 까는 상대가 가진 '까여도 싼 사유' 로 인해 정당화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망콘콘의 까기가 정당한지 여부가 아니다.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며 망콘콘을 변호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망콘콘의 까기는 대책없고 한심해 보이지만 그 한심한 짓거리를 완벽히 논파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당연하다. 망콘콘은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게서 자신의 정당성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br><br><strong>증오를 즐기다</strong><br><br>&nbsp;대책없는 전방위 까기 공격이나 자신의 까기를 그럴듯하게 정당화하는 것은 다른 블로거들도 흔히 하는 일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명박 대통령을 '까는' 자타칭 진지한 블로거들도 그런 일을 하지 않는가? 망콘갤이 특별한 이유는 한가지 더있다. 까기를 오락의 수준, 나아가 축제의 수준으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망콘갤을 특별하게 만드는 또다른 이유다.<br><br>&nbsp;망콘갤은 유쾌한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증오와 미움의 냄새가 난다.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다. 상대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거의 항상 존재하는 곳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망콘갤은 즐겁다. 유쾌하다. 망콘갤러들은 망콘갤을 즐긴다. 그것이 증오와 미움을 담고 있지만 망콘갤 방문자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즐겁다. 그냥 그것으로 끝이다. 망콘콘이 '싫은놈 투표' 라는 최악의 이벤트를 열었을 때 진지하게 그것을 말리고 반대한 블로거들은 거의 없었다. 몇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바로 그 이유, '뻘글에 진지하게 반응했다' 는 이유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br><br>&nbsp;이제 일단 사태가 가라앉았으니 천천히 돌이켜 보자. 망콘콘이 처음에 그 이벤트를 열었을 때 이글루스가 한번 발칵 뒤집히리라는 것은 많은 이들이 예상했다. 아마 누가 싫은놈으로 뽑힐 것인지도 대충 예상했을 것이고, 그것이 대략 정신을 멍하게 할 정도로 골때리는 이벤트라는 것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엄청난 수의 덧글이 달렸고 진지한 반응은 병신취급을 받았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그것은 하나의 축제였다. 축제이기에 그 축제에 진지하게 반응한 자들은 병신이 되고 반대로 축제를 축제로 즐긴 이들은 그것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다.&nbsp;<br>&nbsp;<br><strong>망콘콘의 위대함</strong><br><br>&nbsp;잠시 눈길을 망콘갤에서 망콘갤을 운영하는 문제의 인물, 망콘콘 개인에게 돌려보자. 망콘콘은 놀라운 재능을 가진 인물이다. 적절한 떡밥을 던질 줄 알고, 사람들을 낚으며 즐거워하는 방법도 안다. 결정적으로 증오와 미움을 즐거운 축제로, 놀이로 교묘하게 바꾸는 법을 안다. 한마디로 그는 대중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고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이런 인간이 정치판 대신 인터넷에서 노는 데 감사하자)<br><br>&nbsp;그러나 망콘콘의 진정한 능력, 어쩌면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과 대범함은 다른곳에 있다. 바로 자신을 '적당히' 깔 줄 안다는 점이다. 블로거들, 특히 메이저라 불리는 블로거들이 빠지는 가장 큰 실책은 자신을 보통 사람들 위에 놓고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는 우월의식에 빠지는 것이다. 특히 정치나 사회문제 관련 블로거들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나는 관심법을 못쓰니 망콘콘이 이러한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확실한 것은 망콘콘은 다른 대다수의 메이저 블로거들이 하는 것과는 반대로 자신을 보통 사람들보다 아래에 놓는다.<br><br>&nbsp;사람들은 망콘갤을 즐기는 만큼 망콘콘을 깐다. 망콘콘 까기는 망콘갤의 고정 떡밥이자 망콘갤러들의 즐거운 오락이다. 망콘콘은 온갖 종류의 욕을 먹는다. 진지한 비판부터 개찌질이라는 쌍욕까지 말이다. 그리고 종종 키보드 배틀에 휘말린다. 그래도 그는 계속 '찌질이짓' 을 한다. 이글루가 폐쇄되어도 굴하지 않고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나서 블로깅을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망콘콘의 찌질함을 보며 즐거워한다. <br><br>&nbsp;여기서 놀라운 점은 그렇게 까이고 웃음거리가 되는 망콘콘이지만 사람들은 망콘콘을 함부로 하기 힘들어한다는 점이다. 쉽게 범접할 수 없는 포스가 있다고 할까? 어쨌든 그렇다. 망콘콘은 만인의 술안주지만 동시에 그는 한 블로거 정도는 순식간에 병신만들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망콘콘을 까면서도 그에대한 일련의 경외심을 버리지 못한다. 망콘식으로 말하자면 누구에게나 후장을 대주지만 언제 자신의 후장을 털어버릴 지 모르는 인간. 이것이 바로 망콘콘이다.<br><br><strong>인터넷은 망콘갤인가?<br></strong><br>&nbsp;여태까지 망콘갤과 망콘갤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제법 긴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망콘갤은 기본적으로 까는 공간, 즉 증오의 공간이다. 하지만 그 까이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단점은 망콘콘의 까기를 정당화하고, 망콘콘은 증오의 공간을 축제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 능력의 원천은 '자신을 적당히 깔 줄 아는' 망콘콘의 처신이다. 한마디로 증오를 당당한 축제로 바꾸는 곳! 이곳이 바로 망콘갤인 셈이다.<br><br>&nbsp;그렇다면 인터넷 공간은 어떠한가?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워낙 넓고 수많은 개성있는 이들이 있기에 어떻다고 정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곳 이글루스나 블로거들이 활동하는 블로거 메타 사이트들, 그리고 각종 화재와 사건을 만들어내는 DC나 네이버 같은 곳의 일반적인 특징 정도는 살펴볼 수 있으리라 본다.<br><br>&nbsp;일단 나에게 익숙한 몇몇 공간들 - 이글루스, 올블로그, 네이버, 다음, DC - 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분명 이 공간들은 인터넷의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인터넷상에서&nbsp;이른바 '사이버 여론' 을 만들고 그곳을 유표시키는 곳들로 인터넷상의 여론 흐름과 익명성 뒤에 숨은 네티즌들의 행동을 분석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그렇다면 과연 이 공간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그 공간에서 활동하는 익명의 네티즌들은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을 할까?<br><br>&nbsp;놀랍게도 서로 다른 취향과 정치 의식과 생활 양식을 가진 불특정 다수의 행동/사고 패턴은 망콘갤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앞에서 내가 이야기한 망콘갤의 마력인'증오를 당당한 축제로 바꾸는 힘' 은 이글루스에도, 네이버에도, DC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nbsp;<br><br><strong>사례연구 : 광우병 파동</strong><br><br>&nbsp;이를테면 이번 광우병 파동에 대응하는 네티즌들과 인터넷 여론의 흐름을 생각해 보자. 종종 '개념글' 을 쓰는 뛰어난 블로거나&nbsp;네티즌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블로거스피어의 글, 네이버 뉴스의 덧글, DC의 수많은 게시물들의 '대 다 수' 는 이명박 까기, 혹은 미국 까기&nbsp;그 이상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게 아니라면 얼토당토 않은 존내 쎈 투명 프리온 괴담이 진실인 양 인터넷상에 널리 유포되겠는가? 이 마당에서 노무현 만세나 문국현 만세라는 말이 나오겠는가?<br><br>&nbsp;이명박을 비난, 혹은 비판하는 네티즌들을 싸잡아 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정당성이 자기 스스로의 과학적 검증이나 탄탄한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광우병에 대한 과장된 공포와 이명박 정부의 무능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치 망콘콘의 까기가 그렇듯 그것은 '정당한' 것이라기보다 '상대를 통해 정당성을 얻는' 다. 이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상대가 막장이면 그 막장을 비판하는 게 정당화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nbsp;내가 주목하고 싶은 점은&nbsp;좋고 나쁘고를 떠나 정당화의 과정과 정당화의 이유가 망콘갤과 유사하다는 사실이다.<br><br>&nbsp;그렇다면 망콘갤의 마지막 요건. 증오의 축제화는 어떤가? 이명박 까기는 축제인가?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100%는 아닐지라도 상당 부분 이명박 까기는 네티즌들의 오락이 되었고, 서로 트랙백과 덧글을 나누며 이명박의 막장성과 그 이명박을 지지한 국민들을 비난하는 것은 많은 블로거들의 포스팅 내용이다. 축제. 이명박 까기는 축제다. 초등학생도 중학생도 이명박을 깐다. 광우병의 공포가 실제 어느 정도인지, 이명박이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왜 잘못했는지는 뒷전으로 밀린채 이명박 을 까는 행위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되어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요 몇주간 이글루스만 둘러봐도 잘 알 수 있다.<br><br><strong>결론 : 망콘콘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작동하는가?<br></strong><br>&nbsp;블로그에 끄적인 글 치고는 결코 짧지않은 글을 이제 정리할 시간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결국 이거다. 인터넷은 망콘갤이다! 비록 인터넷이라는 넓은 공간과 그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들의 서로 다른 행동과 생각이 망콘갤과 같은 동질성을 보여주지 못할 뿐 인터넷은 놀라울 정도로 망콘갤의 행동과 사고 방식 - 즉 망콘콘 이데올로기 - 과 유사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아니 그 반대로 망콘갤이야말로 인터넷이라는 넓은 공간의 본질을 블로그라는 작은 공간에 구현하고 있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어쩌면'찌질이 블로거' 에 불과한 망콘콘이 수많은 사람들을 끌고 다니는&nbsp;현상도 지극히&nbsp;당연한&nbsp;일이다.<br>&nbsp;<br>&nbsp;그렇다면 도대체 인터넷을 지배하고 있는 망콘콘 이데올로기는 왜 생긴 것이며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쳐 작동하는가? 나로서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다만 현실에서 풀지 못한 미움을 풀고자 하는 배설욕구와,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자 하는 발언 욕구, 그리고 관심을 받고싶은 관심 욕구가 인터넷의 익명성과 합쳐져서 거대한 증오의 축제를 낳지 않았나 하는 추측만 할 뿐이다. 하기야 어쩌면 그 증오의 축제가 있는 만큼이나 진지한 사람들이 있고, 또 인터넷상의 축제는 대부분 현실앞에서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망콘콘 이데올로기는 의외로&nbsp;심각한 문제는 아닐수도 있다.<br><br>&nbsp;다만 이번 망콘콘의 '싫은놈 투표' 와 같이 망콘콘 이데올로기가 극단적인 방향으로 폭주하는 것만 적절히 제어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어차피 순수하고 깨끗한 인터넷이란 환상에 가깝다. 그리고 미움을 마음속에 쌓아두거나 그걸 현실에서 푸는 것보다 인터넷 안에서 한바탕 축제와 같이 날려버리는 편이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건전하다. 당장 나 자신도 망콘콘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게 따르는 일개 네티즌일 뿐이다. 어느 세상에나 완벽한 제도, 완벽한 이념, 완벽한 사회는 없다. 인터넷 공간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망콘갤에 돌을 던지는 것보다 망콘갤에서 미친척하고 노는 게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br><br><br>5/10			 ]]> 
		</description>
		<category>글</category>
		<pubDate>Mon, 12 May 2008 02:39:06 GMT</pubDate>
		<dc:creator>이녁</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이녁다운, 지극히 이녁다운 귀환 ]]> </title>
		<link>http://leenyuk.egloos.com/1693391</link>
		<guid>http://leenyuk.egloos.com/1693391</guid>
		<description>
			<![CDATA[ 
  &nbsp;아직 채 보름이 안지났다. 그냥 가출이라 해두자. 좌절로 인한 포기도 미래를 위한 현명한 투자도 아닌 객기어린 가출. 이게 나에게는 가장 편하다. 그리고 얼마 후 돌아왔다.<br><br>&nbsp;왜 가출했냐고 묻는다면 세상에 더이상 이녁이 있을 자리가 없어 보여서. 왜 허망하게 돌아왔냐고 묻는다면 어딘가 이녁이 있어야 할 곳이 필요해서. 그뿐이다.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이녁이 있어야 할 자리가 필요하다. <br><br>&nbsp;웃긴다면 웃기는 이야기지만 이녁은 나, 그러니까 이용운과는 다르다. 일상을 살아가는 이용운에게 이용운의 자리가 필요하듯 이녁에게는 이녁의 자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자리는 이곳, 바로 이곳뿐이다. 이녁이 살아온 자리이고 이녁이 말할수 있는 자리인 바로 이곳.<br><br>&nbsp;슬프게도 이곳은 모순없는 세계Part3 가 아니다. 아직 나는 2에서 3으로 넘어갈 준비도 각오도 능력도 없다. 그래서 그냥 이녁의 모순없는 세계다. 굳이 따자면 2.5정도 될까.<br><br>&nbsp;부끄럽다. 이 한마디 이상 어떤 말도 의미없다. 부끄럽다. 멋지게 그만두지도 못하고 깔끔하게 끝내지도 못하고 개운하게 돌아오지도 못했다.&nbsp;어쩌면 지극히 이녁다운 가출이고 이녁다운 귀환이다. 어느쪽도 택하지 못하고 그 중간 어딘가에서 방황하는 이녁에 어울린다면 어울린다. <br><br>&nbsp;어쨌든 돌아왔다. 그리고 편하다. 역시 이녁에게는 이녁만의 세계가 필요한 법이다. 무너지지 않은 그 세계가. 이걸로 이녁다운 가출은 끝이다. 물론 가출 전과 완전히 같을수는 없겠지만 말이다.<br><br /><br /><strong><span style="FONT-SIZE: 85%; COLOR: #000099">이녁의 모순없는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span></strong>			 ]]> 
		</description>
		<category>미분류</category>
		<pubDate>Sun, 11 May 2008 17:12:56 GMT</pubDate>
		<dc:creator>이녁</dc:creator>
	</item>
</channel>
</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