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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되다니. Ⅱ. 뒤늦게 이오공감을 뒤적이다 허지웅님의 글을 발견하고 몇자 끄적인다. 부디 허지웅님에게 큰 실례가 안 되기를 바랄 뿐이다. Ⅲ. 허지웅님 블로그에 달린 덧글이나 트랙백을 보면 글을 둘러싼 논쟁의 초점은 비폭력에 맞추어져 있는 걸 알 수 있다. 허지웅님의 글 제목도 그렇다. 그러나 내가 허지웅님의 글에서 주목한 건 비폭력이냐 폭력이냐, 혹은 시민들의 물리적 행동이 정당한가 여부가 아니다. 허지웅님이 반복해 사용한 '우리는 가짜 세계에 살고 있다.' 이 문장이다. Ⅳ. 허지웅님은 왜 비폭력을 쉽게 말하지 말라고 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짜세계, 거짓된 평화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허지웅님에 따르면 거짓된 평화의 세계에서 비폭력은 한없이 아름답고 정당해 보이지만 그건 한없는 패배주의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실을 아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진짜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진짜세계를 용기있게 본다면 함부로 비폭력을 논하지 못할 것이다. 나(=허지웅님)는 가짜세계가 싫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허지웅님의 글은 이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우리는 지금, 절실한 혁명과 유약한 개선의 갈림길에 서 있다. 허지웅" 결국 진짜세계와 가짜세계를 나눈 뒤, 가짜세계에 안주해 비폭력을 외치지 말고 당당하게 진짜세계로 나서자는 것이 허지웅님 글의 핵심인 셈이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읽었다. (설마 허지웅님이 '평론가' 의 해석이 '원저자' 의 해석과 다르다고 화내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Ⅴ. 글의 난해함이나 인과구조의 어색함은 일단 접어두자. 비폭력의 당위성에 대한 이야기도 여기서 반복하고 싶지 않다. 내가 허지웅님의 글에서 불편함을 느낀 이유는 따로있다. 바로 진짜세계와 가짜세계를 나누고, 가짜세계에 지긋지긋함(그리고 역겨움)을 느끼는 허지웅님의 생각이다.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진짜세계는 있는가?" 아마 허지웅님이나 허지웅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분들은 MB정부가 국민들을 무시하고, 전경이 시민들을 때리며, 닭장차로 사람들이 끌려가는 세계가 진짜세계라고 생각할 터이다. 맞다. 그 세계는 진짜세계다. 그것도 우리가 보기 싫어하고 때로 애써 회피하는 진짜세계다. 그러나 그것은 수많은 진짜세계의 한 부분일 뿐이지 가짜세계와 다른 진정한 단 하나의 진짜세계는 아니다. 이게 중요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두 인간이 진짜세계를 알 수 있다는 건 오만이다. 진짜세계는 광화문과 청계천, 청와대 근처에만 있는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어디에서는 추위에 떠는 독거노인이 있고, 세계 어디에선가는 단돈 몇백원, 몇십원이 없어 굶어죽는 아이들이 있다. 물타기라고? 글쎄, 그것들도 우리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는 더러운 것들, 가짜 평화에 감추어진 부조리이다. 이참에 한번 추위에 떠는 노인에게, MB심판을 외치며 촛불을 든 시민들의 행위가 진짜세계에 가까울까, 아니면 돈 한푼 주는이 없이 비내리는 6월2일이 진짜세계에 가까울까 한번 생각해 보는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이런 상황은 어떨까. 만약 독거노인 돕기 운동을 열심히 하는 어떤 사람이, 소외된 노인들에게 무관심하고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당신에게 찾아와 너는 가짜세계에 있다! 그건 거짓된 세계다! 라고 선언한다. 좀 더 스케일을 키우면 "지금 중국 사천성에서 엄청난 사람이 죽어가는데 너는 편하게 잠이 오냐!" 와 같은 비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Ⅵ. 허지웅님은 아침 직장에 출근해 깔깔거리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듣기 싫고, 그것이 마치 가짜세계인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일 없이 일상을 즐기는 사람에게도 지겨움과 혐오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잘못인가? 깔깔거리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일상이 가짜세계인가? 앞서 말한것처럼 진짜세계는 광화문이나 청계천에만 있는게 아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우리가 놓쳤던, 혹은 외면했던 진짜세계가 수없이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그 모든 진짜세계를 챙길 수 없다. 아무리 초인적인 위인이라도 그건 불가능하다. 특히 갈수록 세상이 복잡해지고, 사회모순이 커지며, 동시에 엄청난 정보를 접하는 현대인은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계를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한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자신만의 진짜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허지웅님에게 진짜세계는 MB정부와 맞서는 현장에 있을 터이고, 나에게 진짜세계는 학교에 있다. 깔깔거리는 직원들의 진짜세계는 직장과 그 직장에 다니는 반복되는 일상이다. 어디에도 가짜는 없다. 누군가에게 그 깔깔거리는 직업, 평범한 소시민적 삶이 지긋지긋할지 몰라도, 깔깔거리는 직원에게 그 직업은 자신의 생존과 반쯤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당장 직업을 잃으면 어떻게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직원에게 가족이 있다면 또 어쩌란 말인가. 그건 결코 가짜세계가 아니다. 한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생존의 문제가 달린 치열한 진짜세계의 일부다. Ⅶ. 이런 지적은 가능하다. 당신의 일상, 당신의 세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공적인 일이 있으니 거기에 동참해야 한다는 지적 말이다. 나 역시 이런 주장에는 동의한다. 모든 사람이 일상에만 매몰된 세상은 진보가 없는 세상, 어두운 세상이다. 때로는 과감하게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밝히기 위해 촛불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는 가짜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진짜 세계로 나와야 한다. 가짜세계에서 함부로 말을 내뱉지 마라" 는 선언으로 이어지면 곤란하다. 그것은 수많은 소시민들의 일상, 소중한 그들의 세계를 순식간에 '가짜세계' 로 바꿔버린다. 동시에 선언자들은 진짜세계를 알고, 나아가 그곳을 향해 가짜세계의 소시민들을 인도해야 할 선구자로 포장된다. 물론 허지웅님은 겸손한 분이고, 다른 이들의 일상을 폄하할 정도로 상식없는 분도 아니다. 가짜세계와 진짜세계라는 표현 역시 자신의 의지와 동참을 호소하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장치라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짜세계와 진짜세계를 나누는 허지웅님식의 사고방식은 위험성을 안고있다. 비폭력을 말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더 큰 폭력을 정당화할 위험성이 있는것처럼 말이다. Ⅷ. 그 위험은 바로 오만과 계몽논리다. 자신(들)이 진정한 진짜세계에 있고, 또 자신(들)이 진짜세계를 알 수 있다는 오만, 그리고 그 진짜세계로 다른 이들, 가짜세계에 안주하는 평범한 이들을 인도해야 한다는 계몽논리 말이다. 잘난척하는 당신들의 혀를 뽑아버리고 싶다는 허지웅님의 강한 어조에서 느껴지는 안좋은 냄새는 분노의 냄새가 아닌 오만의 냄새다. 현장의 무거움, 현장의 급박함을 무기로 다른 이들이 구축한 나름의 세계를 무시하는 오만의 냄새다. 이른바 운동권이 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오늘날과 같이 몰락한 이유는 그들의 물리적인 폭력성 때문만이 아니다. 자신들만이 옳고 다른이들은 틀리다는 오만함, 그리고 잘못된 이들을 자신들이 이끌어야 한다는 계몽논리 때문이기도 하다. 계몽논리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을 연대의 대상, 대화의 대상이 아닌 계몽의 대상, 가르침의 대상으로 격하시킴으로서 그들을 소외시킨다. 그리고 그 소외는 결국 자신들이 세상에서 소외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곤봉과 방패 앞에 쓰러진 '우리'가 일반 시민, 선량한 시민인 것처럼 직장에서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며 웃고, 인터넷에서 상황을 접하며 비폭력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 역시 일반 시민, 선량한 시민, 바로 시위현장에 있는 시민들과 같은 바로 그 시민이다. 당장 허지웅님만 해도 일요일 TV프로그램에 나와 헐리웃 영화,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쇠고기를 강요하는 바로 그 미국의 헐리웃 영화를 웃으며 소개하지 않았던가? Ⅸ. 영화 평론가라는 허지웅님의 직업과, 그 직업에 충실한 일상을 비웃을 수 없는 것처럼, 대다수 소시민들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거짓된 삶으로 깎아내려서는 안된다. 촛불집회가 지금처럼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대다수 소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때문이다. 기말고사를 걱정하는 학생, 야근에 피곤해하는 직장인, 저녁거리를 생각하는 주부들의 참여가 촛불집회를 아름답게 만든 것이지 몇몇 선각자들의 결의넘치는 투쟁이 촛불집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배후세력이 있는것도 아니다. 진실을 아는 소수의 사람들이 집회를 주도한 것도 아니다. 누군가가 가짜세상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깨우쳐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온것도 아니다. 누구는 자녀의 건강을 위해, 누구는 정부의 실정에 분노해서, 다른 누구는 전경의 폭력에 항의하기 위해 나왔다. 수직적인 계몽의 논리가 아닌 수평적이고 자발적인 연대의 움직임이 촛불집회를 만든 것이다. 계몽주의는 독이다. 비록 거리로 나오지 못하더라도 시위대를 응원하고, 비폭력을 간절히 바라는 평범한 이웃들을 소외시키는 위험한 독이다. 그리고 그 독이 퍼지면 촛불시위도 서서히 죽는다. Ⅹ. 계몽이 아니다. 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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